2014년 1월 27일 월요일

복수는 나의 것(박찬욱, 영화 리뷰 - 복수의 끝은 복수, 파괴의 끝은 파괴)

복수는 나의 것(박찬욱, 영화 리뷰 - 복수의 끝은 복수, 파괴의 끝은 파괴)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거치며 사람들은 사회를 배우고 성장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남을 배려하는 윤리에 대해 배우며 자라게 된다. 그런데 만약 태어나서부터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라고 배운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사람은 이기적이고 타인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소시오패스(sociopath)적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람은 보편적인 면도 있지만, 각각 가족을 이루고 사는 형태의 삶을 살기 때문에 각각의 어둠과 아픔 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꼭 보편적인 삶의 기준과 대중적인 요소를 가진 영화를 만들어야한다는 지침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영화를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기존의 근대사회에서는 영화라는 매체가 기술적 한계 등을 이유로 아직 다양한 시도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영화에서 출발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그런 엄격한 헐리우드의 규칙을 지키면서도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냈고, 수많은 감독이 있었지만, 그중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장 뤽 고다르도 최초에는 자신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소중함을 느끼고 싶어하고 그만큼 이미 만들어진 규칙에 대해 도전하는 성향이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도움받아 마땅할 사람들이 오히려 피해를 입는 비정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함은 법이나 공권력을 통해 잘 해결이 되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개인 대 개인의 해소방법을 찾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복수’이다. 기존의 감독들은 복수에 대해 (주인공의 고난-악당에 대한 복수)의 구조였다면, 이 영화는 고난-복수-고난-복수 구조의 반복이다. 영화의 주제는 복수를 하는 개인이 아닌, ‘복수’ 그 자체인 것이다. 기존 복수극의 형식을 파괴하고, 엄연히 법이 존재하는 대한민국에서 법 없이 복수하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고대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모습을 모습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장르를 계속해서 파괴하는 형태로 발전하기도 한다. 너무 많은 파괴로 인해 인간의 보편적 규범까지 파괴된 현실이 영화로 그려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영화를 불편해 할 수 밖에 없다. 
  
 


2012년에 개봉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쟝고>는 기존 서부극을 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기존 서부극의 요소는 (무법시대-서부 개척지-보안관-백인)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요소들을 파괴하였다. (노예제도-미국 남부 노예농장-현상금 사냥꾼-흑인)의 구조로 모든 것이 바뀌어있다. 서부극과 공유하는 것은 시대적 연도 말고는 거의 없다. 파괴를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소재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것에는 성공했다. 그런데 이 파괴가 계속해서 심해질 경우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작품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1차세계대전 이후 기존의 이성과 현실을 거부하던 “다다이즘”이 결국 모든 것을 거부하여 도착한 곳이 현실과 아무런 의미가 없는 “초현실주의”인 것을 생각해보면 무엇이든 극단에 이르지않게 하는 팽팽한 긴장상태가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팬더 너무 귀엽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초현실주의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3차원)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다른 차원에 대해 계속 연구를 하고있고, 중력이 빛을 휘게 만들기도 하며, 아메리카 대륙은 콜럼버스 이전에는 지도에 없었다. 중국의 팬더(panda)곰은 1869년까지, 고릴라(gorilla)는 1902년까지, 대왕오징어는 2004년까지 모두 신화 속 동물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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